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르사유 조약 (문단 편집) == 내용과 회피방법 == || [[파일:German Empire lost territory.png|width=100%]] || || [[독일 제국]]이 상실한 영토 || || 540,857㎢ 에서 72,070㎢ 를 상실하여 468,787㎢ 로 줄었다. 잃은 영토는 약 13%.[* 이 때도 영토 손실이 컸지만, [[제2차 세계대전|27년 뒤]]엔 더 많은 영토를 상실한다.][* 현재 [[독일연방공화국]]은 357,592㎢ 로 [[독일 제국]]의 66%, [[바이마르 공화국]]의 76% 수준이다.] || 베르사유 조약의 주요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 전쟁에 대한 모든 책임은 독일국을 비롯한 [[동맹국]]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며 황제와 군부 핵심 인사를 포함한 전범 800여 명을 인도할 것.[* 베르사유 조약의 가장 큰 논란이자 독일이 가장 큰 치욕으로 여긴 항목. 애초에 제1차 세계 대전은 독일이 시작한 전쟁도 아닌데 독일의 수뇌부에게만 책임을 묻는 게 말이 안 된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협상국도 내심 이를 인정하긴 했는지 [[사라예보 사건]]을 일으킨 [[세르비아 왕국(1882년~1918년)|세르비아]]의 [[전쟁배상금]] 요구를 동맹국이 거부하는 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중립국이었던 네덜란드로 망명했는데 네덜란드에서 인도를 거부했다. 나머지 인사들의 처벌도 흐지부지 되었다.] * [[알자스-로렌]]을 프랑스에 할양할 것, 모든 식민지를 포기할 것.[* 한마디로 독일이 가진 식민지를 승전국들에게 내놓으라고 한 것이다. 실제로 독일 제국의 식민지는 승전국들이 거의 다 가져갔다. 다만 [[알자스-로렌]] 지방과 달리 독일 제국의 [[식민지]]들은 독일 입장에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수준이어서 딱히 크게 아쉬워하지는 않았다. 실제로 나치 독일은 프랑스를 점령하면서 알자스-로렌 지역은 다시 뺏어갔지만 독일 제국 시절의 식민지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물론 탄자니아, 나미비아, 뉴기니 동북부 지역까지 갈 수 있는 여력이 없기도 했겠지만, 나치 독일에서 식민지에 미련이 남아있었으면 [[레벤스라움]]처럼 '옛 식민지들을 되찾자!'라고 말할 텐데 그런 말조차도 안한 걸 보면 그냥 옛 식민지에 대해서 관심없는 게 맞다.] * 벨기에에 [[오이펜-말메디]], 폴란드에 [[포젠]], [[서프로이센]]을 할양할 것,[* 여기에는 [[포즈난 봉기]]가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덴마크 접경 [[슐레스비히]] 북부,[*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 문서 참조] 폴란드 접경 상슐레지엔 및 [[동프로이센]] 남부는 주민 투표로 귀속을 정할 것. 프-독 접경지대 [[자르 분지 지역]]의 탄광권을 15년 동안 프랑스에 넘기고 [[국제 연맹]]의 보호령으로 만들고 [[자르 국민투표|15년 후 국민투표]]로 귀속을 결정할 것, 독일계 주민이 많은 [[그단스크|단치히]]는 국제연맹 자유도시로 정할 것([[단치히 자유시]]),[* 단치히 주민 80%는 독일계라 차마 폴란드에 넘기지 못하고 국제연맹 자유도시라는 명목으로 폴란드 제2공화국과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고등 판무관을 파견하는 것으로 했지만 그래도 철도와 우편은 폴란드 쪽에 맡겼고 또 원래 [[폴란드 분할]] 전엔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영토였기 때문에 사실상 폴란드 영토 취급이 되었다.] [[동프로이센]] 동북부 [[메멜]]은 추후에 주민투표로 귀속을 결정할 때까지 [[클라이페다 지역|국제연맹 관리 하]]로 둘 것.[* 이후 1923년 [[루르 점령]]을 틈타 리투아니아가 기습적으로 메멜을 점령해 합병했다. 그랬다가 1939년 나치 독일이 리투아니아에게 메멜을 반환하라고 최후통첩을 날린 후 다시 메멜을 합병하지만, 1945년에 독일이 소련에 밀려 동프로이센을 내어주고 후퇴하면서 다시 리투아니아에 넘겨 준다. 물론 이때의 리투아니아는 독립국이 아니라 소련에 강제병합되어 그 구성국 리투아니아 SSR이 되어 있어서 실제로 이곳을 집어 삼킨 건 소련이었지만, 그래도 이때 땅 주인 명의를 리투아니아 SSR로 해 놓은 덕택에 훗날 [[노래 혁명]]으로 소련에게서 독립할 때 이 지역을 영토로 할 수 있었다.] * 라인 강 이서(以西) 지역 전부와 라인 강 동쪽 50km 지역을 [[비무장지대]]로 하여 모든 군사시설을 철거하고 신규 군사시설의 건설을 금지, 이 지역에 병력 배치 역시 금지[* 독일 경제의 핵심 공업지대인 라인 강 동쪽 지류 루르 지방이 포함된다.] [[헬골란트]] 또한 군사시설을 철거한 후 비무장화한다. * '''20년 안에 1,320억 마르크를 '[[금]]을 기준으로' 배상.'''[* 전시에 각국의 화폐 가치가 평가 절하되었다. 패전국 독일의 화폐 가치 저하는 안 봐도 비디오였고(승전국은 1914년 기준 30~50% 절하, 패전국은 70%까지 가치가 떨어졌다.) 애초에 1919년 당시 금 기준으로 못박아놨다.][* 현물 배상도 가능해서 주후 독일에서 많이 나는 [[석탄]]으로 배상했다. 석탄 외에도 [[목재]], 각종 금속 [[광석]], 철도용 [[침목]], 전신주, 가축 등으로도 배상했다.] * [[육군]]의 규모를 7개 보병사단과 3개 기병사단, 총 100,000명으로 제한한다. 징병 역시 금지한다.[* 이렇게 대규모 군대를 운용하지 못하게 되면서 독일군(당시 [[국가방위군]])은 남은 10만명을 [[부사관]]과 [[장교]] 위주로 해서 정예군으로 육성하게 되었고, 1920년대에 정예군으로 군복무한 군인들은 훗날 독일 국방군에서 간부들로 활약한다.] * 사관학교와 참모본부를 폐지하고 장교용 군사학교는 3개로 제한한다.[* 명목상으로는 폐지했지만 사관학교는 교관이 직접 생도를 방문하여 교육하는 방법으로, 참모본부는 [[한스 폰 젝트]] 장군이 다른 행정부서로 쪼개서 위장전입시키는 편법으로 존속하면서 모두 회피한다.] * 기존에 독일군이 가지고 있던 대포 5,000문을 양도하며 [[전차]], 중기관총과 기관단총 등 최신 무기의 보유와 제작을 일체 금지한다. 각종 무기의 수출과 수입 역시 금지한다.[* 이 조항도 [[소비에트 연방]]과 비밀 협정을 맺어 농업용 트랙터 등의 이름으로 전차를 개발하고, [[MP18|기관단총]]도 전후 폭동등을 우려하여 소요사태 발생시 그것들을 진압하기 위한 경찰용으로 보유하면서 전부 회피한다. 또한 총열제한도 있었는데, 이건 기병총으로 등록해서 모두 회피하고, 또 대공포등 여러 무기들은 1918년에 만들어졌다고 주장하고, 금지기술은 아얘 해외에 유령회사를 세워서 대놓고 회피한다. 무엇보다 중기관총을 개발하지 못하니까 편법으로 [[MG34|경기]][[MG42|관총]]을 만들었다. 실제로도 중기관총보다 경기관총이 [[제2차 세계 대전|다음에 일어날 전쟁]]에서 더 효과적인 무기였다는 점을 미루어 보아 협상국이 의도했던 무기 개발 금지로 독일군의 힘을 더 약하게 만들자라는 이 방침은 편법으로 전부 무효화 되거나 더 치명적으로 돌아온 것이다.][* 소련이 왜 독일의 전차 개발에 도움을 주었는가에 대해서는 1차 대전때 러시아 제국이 독일과의 전쟁에서 먼저 탈주한 전적 + 공산주의 국가였던 것도 있었다. 하지만 직접적인 원인은 소련도 기갑 부대 창설을 하고 싶지만 그럴만한 전차 제작 기술과 그걸 대규모로 운영할 군사적 능력이 되지 않아 서로 도운 것이었다. 능력은 있지만 전차를 못만드는 독일과 전차를 만들어도 되지만 기술이 없는 소련이 서로의 이득에 따라서 서로 도운 것. 독일은 소련 땅에서 지원받아 전차를 만들고 훈련 시켰으며 소련은 그것을 보고 배웠다.] * [[해군]]의 병력은 15,000명, [[군함]]은 전드레드노트급 전함 6척, 배수량 6천톤 이하의 [[경순양함]] 6척, 배수량 8백톤 이하의 [[구축함]] 12척, 배수량 2백톤 이하의 [[어뢰정]] 12척으로 제한한다. 덤으로 [[잠수함]]도 금지. * [[해군 항공대]]를 비롯한 [[공군]]의 보유를 일체 금지한다. 기존에 갖고 있던 전투기 25,000기를 비롯해 항공기와 관련된 모든 자재를 양도하고 조약 체결 후 6개월 동안 항공기 및 항공기와 관련된 모든 자재의 생산 및 수입을 금지한다.[* 그러나 '''[[V2(로켓)|로켓]]'''에 대한 제한은 전혀 없다. 독일 입장에서는 천만다행이었다.][* 또한 전투기개발이 금지된 회사들은, 경주용 비행기를 개발해 사실상 비행기를 만들고, 맘만 먹으면 전투기개발도 가능했다. 그러나 1935년 히틀러가 아얘 파기를 선언하면서, 아애 대놓고 연구했다... ] *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독일어권 국가들과 다시는 연합하지 말 것.[* 하지만 이 조약은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 연방국|오스트리아]]를 [[오스트리아 병합|합병]]하면서 깨지고, 다음 해에는 [[뮌헨 협정]]으로 최대한 전쟁을 피하려 했던 영국과 프랑스에 의해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Sudetenland) 지역도 독일에 합병되면서 완전히 유명무실해졌다.] * 패전국에서 독립한 국가에서 패전국으로 [[수출]]하는 물건에 대해서, 패전국은 그 물건의 [[수입]]을 거부할 수 없으며, 무관세로 수입해야 한다. 반대로 패전국이 독립한 국가로 물건을 수출할 때는 독립국은 패전국산 물건에 대해서 수입[[관세]]를 부과할 수 있다. * 이 조항에 반발한 [[바이마르 공화국]]이 [[1925년]] [[독일-폴란드 무역 전쟁]]을 일으킨다. 사실 이 조약이 과연 공정한 것인지, 또한 그 당시에 정당화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선 아직도 많은 토론과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영국 GCSE 역사 교육 과정에서는 제1차 세계 대전 대단원 하나를 "Was Treaty of Versailles Fair?"(베르사유 조약은 공평했는가?)라는 문장으로 대표하고 있다. 다른 패전국 사이에서도 * [[오스트리아 제국]]과 [[생제르맹 조약]] * [[헝가리 왕국]]과 [[트리아농 조약]] * [[불가리아 왕국]]과 [[뇌이 조약]] * [[오스만 제국]]과 [[세브르 조약]] 이 줄지어 체결되었다. 모두 비슷하게 영토 할양과 제국 해체, 군비 제한 등의 내용이다. 1,320억 마르크는 전쟁으로 재정이 피폐해진 바이마르 공화국으로써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금액으로, 영국 재무성을 대표하여 참가한 [[존 메이너드 케인스]]를 비롯 협상에 참여했던 경제학자들이 산출한 바이마르 공화국의 지불 가능액 20억 달러(= 약 100억 마르크)의 13배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이렇게 무리한 금액을 요구한 이유는 앞서 언급한 바이마르 공화국의 재기 불능을 위한 것이 가장 컸지만 전쟁으로 인한 부채 상환과도 관련이 있다. 전쟁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진 부채, 특히 미국으로부터 진 부채를 상환하기 위해 바이마르 공화국을 쥐어짜려 한 것이다. 즉 바이마르 공화국을 영원히 구제금융 국가, 부채국가로 만들겠다는 속셈인데, 이렇게 지나치게 가혹한 조약을 강요한 것은 복수심에 불탄 군부가 아니라 냉철해야 할 정치인들이었다. 케인스는 어차피 바이마르 공화국에 못 받고 영국과 프랑스는 [[바이마르 공화국]]에 받아봤자 [[미국]]에 도로 전쟁 때 얻은 빚을 상환해야 하기 때문에 증오와 정치적 혼란만을 일으킬 바에 아예 배상금을 탕감하자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화가 나서 혼자 귀국해버리고 그 길로 재무부에 사표를 제출하고 『평화의 경제적 귀결』이라는 소책자를 써서 베르사유 조약과 협상국 정치인들을 비판했다.[* 실제로도 어차피 바이마르 공화국의 배상금은 미국의 투자로 가능했다. 1929년 [[대공황]]으로 이렇게 준 미국발 단기 자금이 빠져나가자 바이마르 공화국이 무너지고 나치당이 득세한다. 모두 케인스의 예측대로였다.] 군대의 경우에는 확실하게 통제해야 하므로 세세한 항목까지 설정했다. 그러나 위와같은 꼼수로 매우 철저하고 정교하게 피해갔고, 효과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협상국의 제한은 어느 정도는 성과를 거두었다. 2차 대전 개전 당시 독일군은 현역 병력은 많으나 예비 병력의 경우 그 숫자도 적고 기초 훈련도 안돼서 노역자 이외에는 써먹을 수 없는데, 이는 군대의 장기간 소규모화에 따른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었다. 군수 공업도 상당기간 묶여 있어서 화포나 전차의 수준도 연합국에 비해 낮았다. 해군의 경우에도 공산 정권이 들어선 [[소련]]과 과도한 배상 및 군비 제한을 요구하는 [[프랑스]]에 질린 영국 [[총리]]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는 [[드레드노트급 전함]]이긴 하지만 당시에는 이미 2선으로 물러난 [[나사우급 전함]]과 [[헬골란트급 전함]] 8척 보유 정도로 끝낼 것을 생각했다. 허나 [[스캐퍼플로 독일 대양함대 자침 사건]]으로 화가 난 영국이[* 하지만 영국은 한편으로는 프랑스와 독일 함선을 두고 싸울 필요가 없어졌다며 기뻐하기도 했다. 반대로 [[청년학파]] 이후 대형함이 거의 없어 독일의 함선을 탐내던 프랑스는 이 자침에 땅을 쳤다.] 드레드노트급 전함의 보유를 금지하고 해군 규모 역시 대폭 축소하면서 독일 해군은 대형함의 건조가 10년간 끊어졌고 이후 해군을 재건할 때 설계한 군함마다 대부분 1차대전 시의 물건에 약간의 개수를 한 형태일 정도로 막대한 지장을 불러왔다. 결국 독일 해군은 건조가 빠르고 [[비대칭 전력]]인 [[잠수함]] 위주로 해군을 재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나치가 집권해 다시 한 번 전쟁을 벌일 수 있었던 근간이 베르사유 조약으로 분노한 독일 국민들 때문인 것을 생각하면 프랑스 침공 같은 삽질이 없었더라도 다시 한 번 1차대전급 대전쟁을 만들었을, 결과적으로 그것보다 훨씬 더 큰 피를 불러온 엉터리 조약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